📽 환상의 하늘섬, 그 기원과 재탄생 <천공의 성 라퓨타 >와 <걸리버 여행기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명작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보셨나요? 하늘을 떠다니는 신비로운 성, 그 속에 숨겨진 고대 문명의 비밀, 그리고 순수한 소년 파즈와 소녀 시타의 모험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 '라퓨타'라는 이름이 사실은 아주 오래된 고전 문학 작품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바로 조나단 스위프트의 풍자 소설 '걸리버 여행기'입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포스터, <걸리버 여행기> 표지 | 출처:IMDb, amazon

오늘은 이 두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와 '걸리버 여행기'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원작의 모티브를 어떻게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재탄생시켰는지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걸리버 여행기' 속 라퓨타 : 지식인의 허영을 풍자하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흔히 어린이 동화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18세기 영국 사회와 인간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풍자 소설입니다. 걸리버가 방문하는 여러 나라 중 세 번째로 등장하는 곳이 바로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Laputa)'입니다.

<걸리버 여행기> 속 라퓨타 삽화 | 출처:pinterest

'걸리버 여행기' 속 라퓨타는 자석의 힘으로 공중에 떠다니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수학, 천문학, 음악 등 학문에만 몰두하는 지식인들입니다. 이들은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이론에만 매달려,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치기꾼'이라는 하인을 두어 귀와 입을 때려줘야 겨우 집중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을 이용해 지상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 합니다. 스위프트는 이러한 라퓨타인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현실과 괴리된 지식인의 허영과 무능력, 그리고 과학 기술이 오용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날카롭게 풍자했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속 라퓨타 : 잃어버린 문명의 유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천공의 성 라퓨타'는 제목부터 '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오마주를 담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속 라퓨타는 고대 문명이 남긴 거대한 공중 도시이자, 엄청난 과학 기술과 파괴력을 지닌 전설 속의 장소입니다. 이곳은 비행석의 힘으로 하늘에 떠 있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정원과 강력한 로봇 병사들을 품고 있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라퓨타를 발견한 시타와 파즈 | 출처:IMDb

이야기는 전설 속 라퓨타 왕가의 마지막 후손인 소녀 시타와 라퓨타를 찾아 헤매는 소년 파즈의 모험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시타는 자신의 목에 걸린 비행석 때문에 라퓨타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 힘을 노리는 정부 요원 무스카와 해적 도라 일당에게 쫓기게 됩니다. 파즈는 탐험가인 그의 아버지가 라퓨타를 목격하고 사진까지 남겼지만,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아 사기꾼 취급을 받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고 라퓨타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라퓨타를 찾아 헤맵니다. 이들은 라퓨타의 힘을 악용하려는 무스카 대령과 군대에 맞서 라퓨타를 지키려 합니다. 애니메이션 속 라퓨타는 단순히 과학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인간의 탐욕과 순수함,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라퓨타를 촬영하는 파즈의 아버지 | 출처:IMDb

두 작품의 연결고리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재해석

두 '라퓨타'는 하늘을 나는 섬이라는 기본적인 모티브를 공유하지만, 그리는 방식과 메시지는 사뭇 다릅니다.

모티브의 계승과 변형

'걸리버 여행기'의 라퓨타가 풍자의 대상이었다면, '천공의 성 라퓨타'는 경외의 대상이자 지켜야 할 아름다운 유산으로 그려집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스위프트의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단순히 모방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철학과 상상력을 더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했습니다.

기술과 인간의 관계

두 작품 모두 '기술'이라는 요소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고도로 발달한 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현실에서 멀어지게 하고 오만하게 만드는 도구로 그려집니다. 반면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는 라퓨타의 기술이 파괴적인 힘을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생명을 존중하는 방식으로도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타와 파즈가 라퓨타의 파괴적인 힘을 포기하고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결말은 기술의 올바른 사용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미야자키 감독의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시타에게 꽃을 건네는 로봇 | 출처:IMDb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걸리버 여행기'의 라퓨타는 겉으로는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지식인의 허영과 오만함으로 가득 찬 디스토피아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반면 '천공의 성 라퓨타'는 한때 번성했던 문명의 유토피아였지만,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파괴될 위기에 처하며 디스토피아로 변질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결국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에 의해 평화로운 이상향으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고전을 넘어선 새로운 상상력

'천공의 성 라퓨타'는 '걸리버 여행기'의 한 페이지에서 시작되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탁월한 상상력과 메시지 전달 능력으로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원작의 풍자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인간의 순수함, 자연과의 교감, 그리고 기술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아름다운 영상미와 감동적인 스토리로 풀어낸 것입니다.

이처럼 고전 문학 작품이 현대의 애니메이션에 영감을 주고, 그 영감이 또 다른 깊이와 의미를 지닌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은 문학의 힘과 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를 다시 보게 된다면, '걸리버 여행기' 속 라퓨타를 떠올리며 두 작품이 공유하는 메시지와 차이점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 관련 글 보기 : 고전을 계승한 또 하나의 상상력,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와 〈해저 2만 리〉

<천공의 성 라퓨타> 포스터 | 출처:IMDb

TMI : '라퓨타' 이름에 숨겨진 비밀

'라퓨타(Laputa)'라는 단어는 조나단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만든 조어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다소 모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어에서 "la puta"는 "창녀"를 의미하는 매우 저속한 표현입니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당시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 통치를 비판하기 위해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즉, 하늘에 떠서 지상을 통제하는 라퓨타의 모습이 아일랜드를 억압하는 영국을 풍자하는 상징이었고, 'la puta'라는 이름은 영국 통치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천공의 성 라퓨타'를 만들 때 이러한 스페인어 어원을 알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일본어에서는 'L'과 'R' 발음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라퓨타'로 발음되었고, 스페인어권 국가에서는 이 제목이 논란이 되어 다른 이름으로 변경되어 상영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