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간의 고정관념을 깬 건축, 리트벨트의 ‘슈뢰더 하우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의 조용한 주택가,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붉은 벽돌집들 사이에서 마치 현대 미술 작품처럼 돋보이는 건물이 있습니다. 바로 게리트 리트벨트(Gerrit Rietveld)가 설계한 '슈뢰더 하우스(Rietveld Schröder House)'입니다. 1924년에 지어졌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적인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건축가와 디자인 전공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 건물은 단순한 주택을 넘어, 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슈뢰더 하우스' 전경 | 출처:tripadviser

데 스틸(De Stijl) 운동의 살아있는 증거

슈뢰더 하우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데 스틸' 운동을 알아야 합니다. '양식'이라는 뜻의 네덜란드어인 '데 스틸'은 20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예술 운동으로, 몬드리안의 추상 회화에서 영감을 받아 극단적인 추상과 단순화를 추구했습니다. 수평과 수직선, 그리고 삼원색(빨강, 노랑, 파랑)과 무채색(검정, 흰색, 회색)만을 사용하여 형태와 비례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리트벨트는 이 데 스틸 운동의 핵심 멤버였으며, 그의 작품인 '레드 앤 블루 체어(Red and Blue Chair)'는 데 스틸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슈뢰더 하우스는 이러한 데 스틸의 건축적 이념을 완벽하게 구현한 거의 유일한 건물로 평가됩니다. 건물의 외관은 마치 몬드리안의 회화가 입체로 솟아오른 듯, 수평과 수직의 면들이 서로 교차하며 공중에 부유하는 인상을 줍니다. 각 면은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과 흰색, 검은색, 회색으로 칠해져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당시 건축의 일반적인 관념인 '닫힌 상자(house as a box)' 형태에서 벗어나, 공간을 면과 선으로 해체하여 재구성한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고정관념을 깬 유연한 공간의 혁신

슈뢰더 하우스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 집은 건축가 리트벨트와 의뢰인인 트루스 슈뢰더-슈레더 부인의 긴밀한 협력으로 탄생했습니다. 젊은 과부였던 슈뢰더 부인은 당시의 주택이 제공하지 못하는 '자유롭고 유연한 공간'을 원했습니다. 리트벨트는 이러한 그녀의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혁신적인 설계를 선보였습니다.

'슈뢰더 하우스' 2층 | 출처:unesco

2층은 이 건물의 핵심이자 리트벨트 철학의 결정판입니다. 1층은 주방, 식당, 작업실 등으로 고정된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2층은 미닫이문과 회전 패널을 이용하여 필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형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모든 벽이 움직일 수 있어, 낮에는 하나의 넓은 개방형 공간으로 사용되다가 밤에는 슬라이딩 도어를 닫아 3개의 침실과 거실로 분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혁신이었으며, '가변형 공간'의 개념을 건축에 최초로 도입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또한, 실내와 외부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리트벨트의 의지는 창문과 발코니에서도 드러납니다. 특히 코너의 창문은 활짝 열면 건물의 모서리가 사라지는 듯한 착시 효과를 주어, 실내에 있는 사람이 마치 외부 공간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각 방마다 외부로 통하는 문이나 창문이 있어 공간의 연속성을 강조한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처럼 “닫힘과 열림”의 상태를 자유롭게 조절하는 방식은 오늘날 개방형 주거 공간이나 리모델링 개념의 시초로 평가됩니다.

건축, 가구, 그리고 생활 양식의 조화

리트벨트는 건축가이면서 동시에 가구 디자이너로도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레드 앤 블루 체어' 역시 슈뢰더 하우스와 같은 데 스틸 이념을 담고 있습니다. 이 집의 가구들은 단순한 인테리어가 아니라 건축의 일부로 작동합니다. 리트벨트가 직접 디자인한 책상과 의자, 선반들은 건물의 색상과 구조와 조화를 이루며 배치되어 있습니다. 마치 건물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가구들은 단순한 가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건물의 형태, 색상, 기능과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이는 건축, 가구, 그리고 생활 양식이 조화롭게 결합된 디자인(Integrated Design) 개념을 실현하려는 리트벨트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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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블루 체어 | 출처:unesco

슈뢰더 부인은 리트벨트가 설계한 이 집에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이는 단순히 건축가의 명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원했던 자유롭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을 이 집이 완벽하게 담아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슈뢰더 하우스가 현대 건축에 미친 영향

오늘날 슈뢰더 하우스는 현대 건축 디자인의 기본 틀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당시에는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로 여겨졌던 유연한 공간 구성과 개방적인 평면 계획, 그리고 기능성과 심미성의 조화가 이후 모더니즘 건축의 핵심 원리가 되었죠. 이러한 특징은 나아가 미니멀리즘과 모듈러 디자인의 출발점으로 이어졌으며, 지금도 건축과 디자인 교육에서 빠질 수 없는 연구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실내디자인 전공 학생들이 슈뢰더 하우스의 도면을 그리거나 모형을 만드는 과제를 통해 ‘형태와 기능의 통합’을 배우고 있습니다.

작은 규모의 주택이지만 슈뢰더 하우스는 건축의 본질과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고정된 벽을 넘어선 유연한 공간, 실내와 외부의 경계를 허무는 개방성, 그리고 단순한 형태 속에서 발견하는 풍부한 색채의 조화는 시대를 초월해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줍니다. 리트벨트의 슈뢰더 하우스는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지속 가능한 건축과 유연한 주거 공간의 해답을 제시하는 살아있는 건축입니다.

우리는 건축을 이야기할 때 흔히 거대한 구조물이나 화려한 외관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슈뢰더 하우스는 건축이 인간의 삶과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집은 ‘작은 공간에도 철학이 깃들 수 있다’는 믿음을 남겼습니다.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형태와 삶을 일치시킨 리트벨트의 실험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래의 건축’을 말하고 있습니다.